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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이야기

경전 조회 수 13001 추천 수 0 2014.02.02 15:15:20

금강반야바라밀경은?

 

『금강경(金剛經)』은 불교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경이다. 불교(佛敎)의 경전(經典)은 다른 종교의 경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오래 되었다고 구약, 늦게 했다고 신약이라고 하는 그런 식이 아니고 전부 깨달은 사람, 즉 부처님의 깨달음과 같은 경지를 성취하신 분들이 작은 제목을 짓고 경전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부처님의 경전은 한 권을 다 읽지 못했을지라도 그 경전의 이름만 한 번 읽어도 다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하는 것이 특색이라면 특색이다.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이렇게 한 번만 음미해 보아도 무엇인가 그 이름 속의 오묘함이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다. 아무리 설명을 잘 하고 이해시키려 하지만 설명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어서 천도재를 지낼 때도 제일가는 경전이 금강경이다. 선망부모님을 천도해 드릴 때 금강경을 다 읽지 못하여도, 천도문에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 라는 사구게(四句偈)가 들어 있으면 전권을 다 읽는 공덕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금강" 이란 말은 견고하여 단단한 다이아몬드와 같이 굳고 예리한 어떠한 물질에도 부서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금강은 보배라 할 수 있다. 무엇이 가장 소중한 보배일까? 인간에게 있어서, 사람에게 있어서, 천지 만물에 있어서 공통되게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이라고 본다. 우리가 이 세상에 천하게 태어 나든 귀하게 태어나든 똑같이 소중한 생명으로 태어난 것, 그것이 가장 소중한 보배가 아니겠는가. 금강은 시련 속에서 빛나며, 유혹 속에서는 더욱 굳건해지며, 삼독(三毒: 1.탐-貪-욕심 2.진-瞋-성냄 3.치-痴-어리석음) 의 불꽃에 시달릴 때 새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구원의 지혜이다.

 

"반야" 는 지혜라고도 한다. 그러나 지혜로 설명할 수 없는 깨달음의 세계를 반야라고 할 수 있다. 반야의 세계는 지식과 지혜로 설명될 수 없다. 반야는 부처님의 세계요 성인(聖人)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중생의 세계이기도 하다. 한 그루의 소나무를 볼 때 중생이 볼 수 있는 부분은 줄기와 잎뿐이다.깨달음을 얻은 이는 줄기와 잎과 뿌리까지도 볼 수 있는 밝은 눈이 있다. 반야의 지혜란 광명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세계를 이해하고 수용하며 그곳에 같이 머물면서 작은 빛이지만 함께 나누며 더불어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속에는 새 생명의 샘물인 반야가 넘쳐 난다. 남도 살리고 자기도 사는 것이 진정한 지혜이다. 

 

"바라밀" 우리는 오늘보다는 내일, 올해보다는 내년, "이 언덕(차안/此岸:중생의 세계)"의 삶에서 "저 언덕(피안/彼岸:부처님 세계) 을 향해 나아간다.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아버지에서 할아버지로, 엄마에서 어머니로, 그렇게 끊임없이 변해간다. 권력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재산이 많은 사람도 없는 사람도,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평등한 언덕, 어김없이 찾아오는 생, 로, 병, 사,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언덕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언덕"은 삼독의 언덕이다. 설탕을 황금으로 변화시켜도 만족 할 줄 모르는 것이 이 언덕이다. 어리석은 욕망과 집착으로 사람들 은 갈등하고 투쟁하고 심지어 폭력까지 자행한다. 과연 "이 언덕"은 절망의 언덕인가? 그래서 도피안(到彼岸)의 세계인 "저 언덕"으로 가야만 하는가? 바라밀의 진정한 언덕은 수난과 고통이 현존하는 현재의 언덕이다. 저 언덕은 현실의 언덕을 소화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언덕임을 알아야 한다. 저 언덕, 이상향의 세계는 신(神)이 주는 것이 아니며, 성현(聖賢)이 주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행복의 언덕, 해탈의 언덕은 고뇌와 슬픔, 좌절과 시련, 고통과 인욕(忍辱)으로 만들어진 바라밀의 배를 타야만 갈 수 있는 저 언덕이다. 고통과 시련, 좌절과 슬픔을 거치지 않은 언덕은 도피안이 될 수 없다. 피안의 세계는 이상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피안의 세계는 현재에서, 현실에서 찾아야 한다. 저 언덕은 현실을 직시(直視)하고 시대를 직시하고 국가와 인류를 직시하며 만유(萬類) 중생을 직시하는 세계인 것이다. 내가 있어 이 언덕이요, 네가 있어 저 언덕이다. 이 언덕과 저 언덕을 함께 공유(共有)하는 것이 피안의 세계다. 산이 있어 물이 좋고, 물이 있어 산이 좋은 세계이다.

"길을 간다" 길을 갈 때 그 길을 잘 아는 사람과 같이 간다면 편리하고 유리할것이다. 자기 고집대로 간다면 그 길은 고달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혜로운 믿음을 가지고 가는 길은 성현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길이다. 어두운 밤 등불이 없다면 그 길은 너무나 위험하고 힘든 길이 될 것이다. 간다고 가는 길인가? 생각하며 가는 길이어야 한다. 어릴 때 걷는 길과 어른이 되어 걷는 길은 다르다. 그 시기와 때에 따라 학생으로, 직장인으로, 공공인으로 우리는 인생이란 길을 간다. 부부가 가는길, 친구와 가는 길, 사랑하는 사람과 가는 길, 아버지의 길, 어머니의 길, 지도자의 길, 성직자의 길, 등 그러한 길에는 언제나 반드시 그 시대가 요구하는 길이 있다. 그러한 길에서 우리는 그 분야의 지도자의 안내를 받고 걷는다면 한결 수월한 길이 될 것이다. 우리는 좋은 길잡이를 만나야 한다. 여행을 하더라도 가이드를 잘 만나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좋은 안내자를 만나야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에는 좋은 스승님을 만나는 것같이 좋은 인연은 없다. 스승이 있는 사람과 스승이 없는 사람이 가는 길은 하늘과 땅차이 만큼 다를 수도 있다. 스승은 높은 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배를 모는 데는 선장이 스승이요, 기차를 모는 데는 기관사가 스승이요, 비행기를 모는 데는 조종사가 스승이다. 빵을 잘 만드는 데는 주방장이, 청소하는 데는 청소부가 제일이다. 풀빵 장사에게도 배울 것이 있고, 대학교수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 그와 같이 이 세상에는 스승 안닌 것이 없다고 한다. 잘난 것이 스승이 아니라 자기답게 사는 모습이 스승인 것이다. 눈이 밝은 사람은 보이는 것이 다 스승이요, 밝은 귀가 있는 사람은 듣는 것이 다 스승이다. 길은 길이 아니요, 흘러가는 시간과 세월이 진정한 길이다. 길은 발로만 가는 길이 아니라, 영혼의 양심으로 가는 길이 참 길인 것이다. 길이란 인생의 발자취요, 이루어진 업(業)이요, 인연(因緣)의 고리인 것이다. 인연 따라 오고 인연 따라 가는 길, 그것이 거짓 없는 우리들의 길이다. 스승님과 함께 가는 길, 부처님과 함께 가는 길,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길, 그것을 일러 "경(經)" 이라고 말하고싶다. 

 

"구마라즙(鳩摩羅什)" 은 삼장법사(三藏法師)로서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에 뛰어난 위대한 번역가이다. 그는 인도 사람인데 구지국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는 중국말을 중국사람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었다. 8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전쟁통에 이리 시달리고 저리 시달리고, 이 나라에서 뺏어가고 저 나라에서 뺏어가고 했다고 한다. 워낙 보배로운 인물 이었다. 전쟁 중에 이 나라 저 나라 곳곳 지방의 생활 모습을 보고 백성들의 생활과 풍습, 곳곳 지방의 방언(放言)들을 꿰뚫어 알 수 있는, 어떻게 보면 다양한 견문(見聞)을 얻을 수 있는 큰 기회를 같게 되었다. 고생은 했지만 그만큼 불경(佛經)을 중국말로, 한문으로 번역하는데 좋은 수업을 몸소 쌓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이다. 고생은 고생대로 가치가 있는 것이고, 자기가 노력하지 않고 영화를 누리면 영화를 누린 만큼 뒤따르는 과보가 있는 것이다. 고생을 한 만큼 이 분이 남긴 번역이 제일 많고, 또 이 분의 번역은 중국 사람이 쓴 것처럼 그렇게 아름답다고 한다. 번역문(飜譯文) 같지 않게 아름답고 좋은 글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 금강경』에는 여섯 가지 한문 번역이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많이 읽히고, 따라서 우리가 아는 것이 구마라집 번역밖에 없을 정도로 풀이가 잘 되어 있다. 금강경을 32단락으로 나눈 사람은 소명태자라고 하는 아주 훌륭한 분이다. 불교 학자이면서 깨달으신 분으로, 한 줄로 쭉 연결되러 있는 금강경을 공부하시고서 그 내용을 32단락으로 구분하여 나눈 것이다.

 

"경의 결집" 금강경 법회가 열리게 된 원인과 이유, 이걸 옛말로 인유(因由)라 한다. 금강경이 어떻게 해서 설(說)해지게 되었는가? 말하자면 경이 설해지게 된 배경과 내용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아난존자(阿難尊者)가 그 광경을 눈으로 그대로 보고 들은 것처럼 이야기되어 있다. 맨 처음 경전이 결집된 것은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삼 개월 후의 일로, 가섭존자(迦葉尊者)를 상수(上首)로 해서 오백나한이 칠엽굴에서 결집(結集)하였다. 부처님이 열반하시니까, 제자들 중에는 부처님이 돌아가셨으니 하고 싶은 것은 하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은가라며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가섭존자와 같은 점잖은 스님들이 보시고 '아! 이거 큰일났다. 교단을 우지하는데 법률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저놈들이 부처님 살아 계실 때도 말을 안 듣더니, 돌아가시니까 꾸중하고 잔소리 할 분이 없어졌다고 너무 좋아한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나?' 걱정을 태산같이 하다가, '부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을 정리해서 세상에 내어놓고 모든 잘잘못을 그 가르침에 의해서 판단하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신 것이다. 그래서 열반하시고 삼 개월만에 경전을 결집하는 회의를 소집 하게 되었다. 그 당시 최고의 도인 수행자 오백 명을 뽑아 칠엽굴이라는 굴 속에서 경전 결집을 하게 되었는데, 아난은 25년이라는 세월을 부처님을 시봉(侍奉-시중을 듬)한 제자이다. 불교 역사상 가장 기억력이 좋고 영리한 분이 아난존자다. 제일 잘 생긴 분도 아난이었다. 잘 생겨서 여러 가지 구설도 많은 분이다. 부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셨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을, 모든 내용을 다 보고 들었으며, 그것들을 다 기억하고, 그 상황이 몇 년이 지난 후에도 다 그리듯이 보여 줄수 있는 그 정도의 인물이다. 

경전 결집 소식을 듣고 아난존자가 칠엽굴에 달려갔으나, 열리는 경전 결집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왜냐? 논리(論理)와 기억으로는 잘 알지만 도를 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사형 가섭존자가 네가 진정 도를 통했느냐고 물으니까 못했다는 것이다. 도통(道通)을 못했으면 네가 아무리 녹음기처럼 잘 외워도 이 자리에 참석 못한다. 그래서 쫓겨났다. 아난존자는 부처님을 가장 잘 알며 제일 잘 알고 있지만 도통을 못했으니까, 도를 닦지 못했으니까, 여기 결집하는 데 참석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결집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서 불교의 경전은 지금 결집하여라도 깨달아야만 자격이 있는 것이다. 부처님처럼 깨달아야 자격이 있고 깨달은 분만 모여서 결집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깨달은 분이 결집한다면 오늘날 이 시간에 해고 허물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 부처님의 깨달음과 똑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난존자는 그 당시 제일 많이 알고 있었고 제일 기억을 잘 했고 시봉을 25년간 했지만,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 칠엽굴에서 쫓겨났던 것이다. 그래 화가 난 아난존자는 혼자 교족정진(橋足精進)이라고 해서, 발레를 하는 사람처럼 한쪽 발을 뒤꿈치를 들고 칠일간 용맹정진(勇猛精進), 목숨을 던진 정진을 한 끝에 비로서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을 얻은 후 칠엽굴로 찾아가니, 굴은 막히고 담으로 쌓여저서 아무도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아난존자는 이미 깨닫고 신통까지 있어서 아무리 막아 놓고 석벽(石壁)이 무장해도 신통으로 통과해서 들어갔다고 한다. 그 자리에 아난존자가 들어오니까, 당신들끼리 결집을 하다가, '아난존자가 저렇게 도를 통해서 들어왔으니, 이제는 아난존자를 상석(上席)에 앉히고 제일 영리하고 잘 기억하니까 저 사람이 외우도록 하자. 경을 전부 다 이야기하면 우리가 검정만 하도록하자. '라고 결정하었다. 이렇게 해서 성립된 것이 경전이다. 그래서 깨댣지 못하면 경전을 결집할 자격이 없다. 그러한 실례가 불교사에 있는 것이다. 

아난존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 여시아문(如是我聞)"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내용을 저는 들었습니다. 이렇게 딱 한 마디 하니까, 대중들이 잠잠해졌다. 저 사람이 도를 통했지, 신통으로 벽을 뚫고 들어왔지, 그래서 자기 소리를 할 줄 알았는데, '나는 부처님께 이렇게 들었습니다' 라고 하여 자기 소리가 아니고 들은 대로 이야기를 하는데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 한 마디 해 나갈 때마다 오백 명의 도인들이 하나 하나 긍정을 하고 '맞다 맞다' 그렇게 결정을 해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신성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 하면 누구든지 간에 아주 신성시하고. 그만큼 또한 범부(凡夫)가 감히 넘보지 못할 그런 공덕(功德)과 신비(神秘)한 힘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신앙(信仰)의 대상으로 예배하는 불상(佛像) 못지 않은, 어쩌면 불상보다 더 신성시하는 신앙의 대상으로까지 존중하는 것이다. 경전이 있는 곳은 부처님의 탑(塔)이 있는 곳과 똑같고, 부처님의 경전을 함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의미까지 경전에는 포함되어 있다.

 

"자! 이제 금강경이 이루어진 그 곳으로 가서 우리도 아난존자의 말씀을 경청 합시다."

 

法會因由分 第一   : 제1. 법회가 열린 인연

이와 같은 내용을 저는 들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 급고독원에서 일천이백오십 명의 큰 스님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때 세존께서는 공양을 드실 때가 되었으므로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들고 사위성에 들어가서 걸식을 하셨습니다. 그 성안에서 차례대로 걸식하여 마치시고 본 곳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공양을 마치신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습니다. 

 

☞서분. 정종분. 유통분

이와 같이 내가 들으니, 어느 날 부처님께서 이렇게 많은 대중들과 어느 곳에 계셨다. 이러한 이야기는 모든 불교경전(佛敎經典)이 경전으로서 구색을 제대로 갖추기 위한 여섯 가지 조건이다. 그 경전이 경전으로서의 역할, 부처님의 설법(說法), 즉 부처님 말씀이란 것을 믿을 수 있도록 한다는 그런 뜻에서, 이 경을 편찬한 사람이 '내가 들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이 부분을 서분(序分)이라고 한다. 우리가 연설을 하더라도 서론(序論). 본론(本論). 결론(結論)이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서 '서론을 생락하고 본론으로 들어 가겠습니다.' 라고 말을 하면, '서론을 생략하고 ' 라는 말이 서론이 되는 것이다. 그렇듯이, 우리 인간이 하는 행동과 말에는 순서가 있다. 또한 건물을 짓는다고 할 때도,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엮는 것과 같은 순서가 있어야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경전 한 권을 설(說)하시는 데도 유심히 살펴보면 이와 같이 서론. 본론. 결론이 다 들어 있다. 

불교에서는 서론을 서분(序分). 본론을 정종분(正宗分). 결론을 (流通分: 유통분)이라고 한다. 금강경은 일분(一分)이 서분에 해당되고, 이분(二分)부터 삼십이분(三十二分)까지가 정종분에 해당되며 나머지가 유행분에 해당된다. 일단 서론만 잘 살펴보면 본론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충분히 눈치챌 수 있다. 

그래서 서분을 잘 파악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본론은 왜 정종분이라. 하는가? 정종분의 정종은 바를 정(正)자, 으뜸 종(宗)자를 쓴다. 모든 건물의 중심이 되는 부분을 용마루라 하듯이 으뜸이 되는 것을 정종분이라 한다. 결론을 유통분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잘 쓰는 유통한다고 하는 말과 같다. 부처님 법문(法問)을 저 혼자 듣지 말고 좋은 가르침을 많은 사람에게 유통시켜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금강경 안에 '수지독송(受持讀誦) 위인연설(爲人演說)'이라고 하여 금강경을 남에게 소개해 줘야 한다고 하는 유통분의 의미를 사이사이에 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무쪼록 서분에 중요한 부분이 숨겨져 있으니 몇 가지 낱말들은 잘 이해하여 섭렵하기 바란다. 그래야만 금강경의 전체 흐름을 잘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일상생활은 걸식이었다 

지금도 남방불교인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 같은 곳에서는 부처님 당시처럼 스님들이 걸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한국, 일본 등의 북방불교(北方佛敎)에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맞지 않기 때문에 사찰에서 밥을 지어서 먹고 집단적으로 생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시내에서 걸식하고 다시 산으로 돌아와야 하는 등 동남아 지역과 수행생활의 조건이 다르다. 더운 지방인가 추운 지방인가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 것이다. 여기 첫 대목에 걸식(乞食)한다는 말, 밥을 빌었다는 말은 아주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다. 금강경의 전편에 흐르는 주된 사상(思想)이 걸식이라는 이 말에 은연중에 표현되고 있으니, 잘 참구(參究)하여 본다면 구체적인 부처님의 행방을 통해서 금강경의 사상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육조혜능(六祖慧能)대사는 부처님과 다를 바 없는 훌륭한 큰스님이시다. 육조 스님께서는 금강경이 무상(無相)으로 위종(爲宗)을 삼는다고 하셨다. 상(相)이 없어야 한다. 상이 없으므로서 으뜸으로 삼는다. 무상이라는 것은 모양 상(相), 형상 상(像)이다. 그래서 형상이 없다. 우리 마음에 상(相)이 없는 것으로서 으뜸으로 삼는다라고 큰스님께서 명명하신 것이다. 이 말이 금강경을 잘 표현하는 뜻으로 여겨진다. 

육조 스님께서 그렇게 판단하신 이후로 누구나 무상(無相)으로서 금강경을 해석하고 있다. '무상(無相)으로 으뜸을 삼는다.' 그러면 무상이란 무엇인가? 상이 없는것, 상을 내지 않는 것, 낼 상이 없는 것, 날 때부터 상이 없다는 등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상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낼 상이 있어도 우리가 참는 경우이다.  아예 낼 상이 없다는 것은 아예 낼 상이 없다고 하는 이치 그런 이치를 아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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